Se ha denunciado esta presentación.
Utilizamos tu perfil de LinkedIn y tus datos de actividad para personalizar los anuncios y mostrarte publicidad más relevante. Puedes cambiar tus preferencias de publicidad en cualquier momento.

정민,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기술]

12.090 visualizaciones

Publicado el

해방촌 신택리지팀 00해방 문고 시리즈

Publicado en: Educación
  • Sé el primero en comentar

정민,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기술]

  1. 1.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목차 1. 프롤로그 : 해방촌 신택리지 ················· ················· ················ ················ 4 2. 해방촌의 어제 ······················· ······················ ······················ ······················ 6 <해방 이전의 해방촌> ····················· ···················· ···················· ···················· 6 <해방촌의 시작> ······················· ······················· ······················ ······················ 8 <신흥과 쇠락> ······················· ······················· ······················· ······················· 16 <해방촌의 역사도 돌고 돈다> ················· ················· ················ ················ 31 3. 해방촌의 오늘 ······················ ······················ ······················ ····················· 33 <해방촌 청년 이야기> ···················· ···················· ···················· ··················· 33 <해방촌 외국인 이야기> ··················· ··················· ··················· ·················· 38 <해방촌 눈여겨볼만한 것들> ················· ················· ················· ················· 43 4. 해방촌의 내일 ······················ ······················ ······················ ····················· 51 5. 후기 ·························· ·························· ·························· ························· 55 <이 책자 대부분의 내용은 해방촌 신택리지 팀원(밀, 곰자, 윤자, 하람, 돌고래)이 작성 했으며 정민이 편집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1-
  2. 2. 해방촌 신택리지 프롤로그 : 해방촌 신택리지 남산 아랫동네 해방촌. 서울 한가운데에서 서울을 키워낸 곳.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가지가지 펼쳐진 골목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해방촌은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과 4호선 숙대입구역 사이에 봉긋하게 솟아 있는 곳, 이태원 옆 동네다. 패션 잡지에서는 “뭘 좀 아는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핫플레이스”라 소개하고,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7,80년대 서울 골목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 는 곳이라 이야기한다. -2-
  3. 3.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해방과 함께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만든 동네라 해서 해방촌이다. 6,70년대의 급격한 도시화 시기엔 가난한 지방민들이 몰려들어 전국 8도의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잡게 되 었다. 아랫동네에 자리한 미군기지와 옆동네 이태원 덕에 외국인들이 들어와 동네 구멍 가게를 외국인들이 메우는 진귀한 풍경도 엿볼 수 있다. 신택리지 요원들은 책과 논문에 묻혀 해방촌 역사를 공부했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 야기를 들었고, 해방촌 길고양이들을 쫓아다녀도 보고, 주거공동체 빈집에서 살며 구성 원들을 심층탐구하고, 골목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을 했다. 그 작업들을 소개 한다. -3-
  4. 4. 해방촌 신택리지 해방촌의 어제 <해방 이전의 해방촌> 해방촌은 본래 남산 중턱으로, 푸른 소나무와 호랑이, 새와 가재 등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는 산자락이었다. <남산 풍경화_목멱조돈, 정선, 1741년> 남산, 소나무, 호랑이 남산 하면 역시 소나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애국가에도 나오지 않는가. 해방촌의 초기 정착민들이 벤 것 역시 소나무였다. 정착민들이 자꾸 소나무를 베어가며 남산을 더 넓게 차지하자 정부는 철조망을 쳐서 막기도 했다. 그 이전의 남산은 호랑이가 나오는 것으로 유명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 한양판 관으로 부임해보니 집집마다 처마에서부터 땅까지 그물을 늘어뜨리고 있었다고 한다. 장군이 이유를 물으니, 백성들이 "호랑이를 막으려고 그물을 쳐놨다"고 답했다. 이에 장 군은 남산 잠두에 있던 노승을 끌고 와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후 며칠 동안 남산에 선 호랑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때부터 사람을 물어가는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강 장군에게 연유를 물으니, 장군은 이렇게 답했단다. "노승은 사람으로 둔갑 한 호랑이의 우두머리였다. 내가 그에게 무리를 이끌고 떠날 것을 명했다." -4-
  5. 5.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옛 경성호국신사> 해방촌에 있었던 신사 일제 강점기 후반, 일제는 남산 중턱에 호국신사(전사자들을 전쟁의 신으로 추모하는 신사)를 짓기로 결정한다. 청일전쟁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신사였다. 108계단이 바로 그 경성호국신사로 올라가던 계단. 조선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해 지었던 신사는 일제 말기에 건설이 완료되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묘연하다. 단지 108계단과 신사를 위해 쌓았다고 생각되는 옹벽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108계단. 중앙분리대 만 설치되었지, 계단 자체는 옛날의 108계 단 그대로다.> <경성호국신사의 옹 벽이었다고 추정되는 벽.> -5-
  6. 6. 해방촌 신택리지 왜군-청군-일본군-미군 주둔지 해방촌 아래에 있는 지금의 미군기지 자리는 서울 내에서도 교통의 요지로, 예전부터 군대의 주둔지로 이용되곤 했다. 특히나 외국 군대의 주둔지로 이용되는 일이 잦았고, 지금도 미군기지로 미국 법령이 적용되는 미국 땅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군대가 이 곳에 주둔했고, 조선말 임오 군란때에는 청나라 오장경의 군대가 주둔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때에는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이 부근에 자리잡아 일본 거류민의 집단거주지가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1906년에는 일본군 조선주둔사령부기 들어섰다. 일제강점 후에도 일본의 조선군 사령부 가 이 곳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이야말로 일제가 우리나라를 무력통치하던 본거 지라 할 수 있다.’ <한국 주둔 일본군 제 13사단 용산 병영 정문, 저작자 미상> <해방촌의 시작> 신사와 자연뿐이었던 곳에 사람이 찾아오기 시 작한 건 해방 후, 1946년부터였다. 사회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북에서 종교를 탄압 하고 지주층의 재산을 빼앗자 기독교 신자와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대거 월남한 것이다. 살 곳 없던 월남인들이 남산 기슭에 나무를 베 어내서 판자집을 지어 살기 시작한 것이 해방 촌의 시작이었다.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의 1950년대 해방촌 그림> -6-
  7. 7.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1950년대의 해방촌 풍경: 판잣집, 깡통지붕, 폐타이어 해방 뒤, 후암동을 비롯한 남산 밑의 일본동네는 월남민, 특히 서북지역 출신자들이 이 어받는다. 뒤따라 내려온 사람들은 먼저 정착한 동향인들의 동네 가까운 산비탈에 정착 한다. 그곳이 해방촌이었다. 여러 세대가 힘을 합쳐 루핑(아스팔트로 만든 두루마리)과 판자와 깡통 등으로 집을 지었는데 하도 허술해 “옆집 방귀소리가 들릴 지경”이었고 식수는 남산의 샘물로, “볼 일”은 공중변소로 해결했다. 1950년대 초의 해방촌은, 꼬불꼬불한 골목길가 판잣집 입구 기둥 옆에 대개 변소가 있 었고,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폐타이어를 얹어두었다. 어린이들은 조그만 공간만 있어도 줄넘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1950년대 말경에는 조금 발전한 판자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생철지붕과 시멘트 별돌 로 된 집도 있었고, 시멘트 양기와로 지붕을 얹기도 했다. 조개탄 대신 십구공탄이 보 급되어 삼륜차로 운반을 했다. 약삭빠르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의 하꼬방 해방 후 서울 남산기슭에 생겨난 해방촌이 하꼬 방 경제, 하꼬방 문화의 효시였다. 수많은 귀국동 포와 월남인들이 하나 둘 그곳에 모여들면서 하 꼬방은 취락을 이루고 새 동네로 커졌다. 일본인 소유의 적산가옥(적산이란 적국인의 재산 이라는 뜻으로,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을 말함)은 20만채. 적 산불하(적산가옥을 일반인들에게 나눠주는 것)는 문자 그대로 노다지였고 그만큼 적산가옥쟁탈전 도 치열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떠 난 집에 닥치는대로 문패를 박으며 돌아다녔다. 한 집에 주인이 둘셋씩 생겨 주먹다짐도 심심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 사정에 어두운 귀국동 포와 월남인들은 모리배와 더불어 적산가옥 쟁 <하꼬방. 깡통을 펴 붙인 지붕과 미군 보 급품 상자(레이션 박스)로 만든 벽. 뾰족 구두를 신고 하꼬방으로 들어가는 여자 탈전을 벌일 적수가 못되었다. 더러는 운 좋게 는 ‘양공주’(주한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굴러 들어온 적산가옥을 차고 들어앉기도 했지 하며 돈을 벌던 여성)를 표현한 것 같 만 나머지는 연줄연줄로 셋방을 얻거나 일본인 다.> -7-
  8. 8. 해방촌 신택리지 들이 파 놓은 방공호를 찾아들기도 했다. 그도 저도 안되는 사람들은 급한대로 해방촌 에 판자 나부랭이, 마분지, 천막조각, 레이션 박스의 하꼬(상자, 궤짝이라는 뜻의 일본 어) 조각들로 밤이슬을 막아줄 집을 지었다. 하꼬로 지었다 해서 하꼬방. 하꼬방에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면 하꼬방 난민들은 심란했다. 드럼통을 펴서 깐 구들 장은 성냥 한 개비 신문지 한 장에도 쉽게 더웠지만 그만큼 빨리 식기도 했다. “잠들 때까지만 따듯하면 된다. 빨리 잠들어야지... 빨리 잠들어야지...” 서울 환도 후 하꼬방은 차차 판잣집으로 불리어지면서 우리말을 찾았다. <오발탄>, <해방촌 가는 길>의 해방촌 <영화 <오발탄>에 나온 옛 해방촌> “빈 도시락마저 들지 않은 손이 홀가분해 좋긴 하였지만, 해방촌 고개를 추어오르기에는 뱃속 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 로 접어 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 서들 아무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소설 <오발탄>에 나오는 해방촌 풍경이다. 무질서하게 붙어있는 판잣집들과 비좁은 골 목, 아무데나 마구 버린 뜨물. 이 시기 해방촌은 달동네라고 불렸다. 해방촌의 가난과 험함은 소설 <해방촌 가는 길>에도 담겨 있다. <해방촌 가는 길>은 해 방촌에서 양공주(주한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돈을 벌던 여성)로 사는 여성 기애 의 이야기다. 기애는 중산층의 신분으로 잘 살던 가족들이 모든 것을 잃고 이곳으로 들 어오던 날을 떠올린다. "뒤꿈치가 세 인치나 되는 정신 나간 것처럼 새빨간 빛깔의 구두를 신고, 그 까맣게 높다란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기애는 희뿌연 남산을 바라보고 이 년 전, 그 중턱의 판잣집으로 이사를 오던 날 서글픈 감정을 서로 감추느라고 세 -8-
  9. 9.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식구가 미묘한 고통을 겪은 일을 지금도 생생히 마음 속에 되사려 올렸다. 초라한 판잣집은 정말 너무도 형편이 없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쩌릿하게 아파오도록 그것은 그냥 닭장 이나 헛간과 다를 바 없었다." <영화 <오발탄>에 나 온 해방촌 옛 집> 하지만 가난들이 단순히 절망적이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해방촌에서 토박이 오상석 씨(인디고 운영)는 당시 해방촌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제 기억으로는 열심히 사시는 분들, 정말 치열하게 사셨던 분들. 제 기억은 그래요. 전부 다 요. ... 그래서 해방촌의 정체성 그러면 목숨을 걸고 살아내시던 분들.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들 어요. 저희 부모님 뿐만이 아니고 많은 어르신, 거의 모든 분들이.... 거의 대부분 아마 목숨을 걸고 사셨던 것 같아요. 동네 분위기가.” 서울역과 남대문시장, 남산 허리를 오가며 치열하게 살았던 해방촌 사람들. <해방촌 가 는 길>에도 당시의 분위기가 담겨있다. “벌써 어스름 저녁때였다. 산록을 돌면서 곧장 뻗어 온 넓은 길은 여기서는 실날처럼 가늘어 져가지고 그대로 산허리를 감싸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해방촌의 주민들이 그 길을 따라 속속 돌아들 오고 있다. ... 한결같이 우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처럼 반찬거리들을 들었다. 짚오라기에 엮어든 생선 마리, 파 배춧단, 여인네들 머리 위에는 또 의례 조그만 자루, 상장, 보자기. 놀랍게도 빠른 걸음새로 미끄럽고 좁은 산길을 휙휙 지나간다. 그러면서 동행끼리는 열을 올리며 사업 이야기, 장사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파고드는 듯한 눈길, 여자고 남자고 힘 찬 걸음걸이. 거친 호흡. 똑같은 표정이 어느 몸에나 있었다. 가난과 굴욕. 하지만 삶을 위해서 그것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무엇보다 살아야했기에, 무엇이건 먹고 배우고 일하며 살아야 했던 그 암울한 나날. 해방촌은 그날을 증언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까마득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장사하러, 공부하러 갔고 물을 길어 날랐다. 도 -9-
  10. 10. 해방촌 신택리지 시가 생겨나면 어쩔 수 없이 함께 발달하는 것이 슬럼가다. 도시의 빈민이 살면서 하부 구조를 형성하는 것. 해방촌은 일감이 많은 서울역, 남대문시장 등과도 가까우며 도시 와 일일생활권으로 오갈 수 있는 데다 아직 도시 개발이 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남산의 허리에 켜켜이 들어찬 집들, 사람들. 그들은 이곳에서 도시를 키웠다. 그때 그 사람, 이춘경씨와 선천군민회, 서북청년회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신흥시장 안쪽에 들어서면 시장 가운데쯤 아주 작은 평상이 있다. 거기서 항상 두 분의 어르신들이 얘기를 나누는 걸 볼 수 있는데 그 주인공은 평남상 회 어르신과 신흥상회 이춘경님이다.“내가 후암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데 우리 막내아들 까지도 거기 다녔어. 내가 여기 60년을 살았다는 이야기야.”해방촌에서 사신지 60년이 되셨다는 이춘경(68)님을 만나 50년대 해방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수용품을 파는 이 춘경님. 항상 가게 앞 평상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있다.> “첫 번에 딱 이사 와서 하꼬방 판자촌에서 사는데, 학교 갔다 오면 남산에 나무 줏으러 가는 게 일이었어. 저녁에 밥 해먹으려고. 그 나무를 아궁이에다가 넣는게 아니라 멸치젓 깡통에다 가 뒤에 뻥 뚫어서 연기 나가게 하고 솥 하나 걸고 종이 하나 나무 하나 주워온 거 넣어서 밥 해먹고. 그 화로에다 물 데워서 겨우 어른들만 세수했지. 씻질 않으니까 손이 새카맣게 터. 수돗물이 없어서 남산에서 개울가에다가 이 대나무 파이프를 박아 가지고 여기다가 모아 놓 았어. 여기 물통에다가. 비 안 오면 물도 안 나오면 남영동까지 가서 지게를 지고 왔다고. 그 게 우리 어렸을 때야.” -10-
  11. 11.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영화 <박서방>에 나 온 60년대 해방촌. 물 지게를 지고 언덕을 오르고 있다.> 이춘경님은 평안북도 선천이 고향으로, 6.25 전쟁 당시 4세였다. “당시 큰형님은 결혼해 서 다른 집에 분가해 살고 계셨는데 형님에게 연락할 새도 없었어. 부랴부랴 피난길에 나섰지. 그런데 전쟁이 나던 날 바로 입대한 둘째 형님은 입대 다음날 전사를 했어. 아 버지 또한 피난 가던 길에 마포에서 잡혀 반동분자라는 이름으로 총살당했어”불행한 가족사를 뒤로 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대구 등을 거쳐 해방촌에 온 게 8살. 당시 해 방촌은 북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북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머문다고 생각하고 정착한 장소였다. “통일만 되면 전부 (북으로)돌아간다는 마음으로 선천사람들이 거기서 사니까 선천군민회가 된 거야. 내가 듣기론 피난 내려온 선천지역 군수가 이승만 정부와 거래 를 잘 했나봐. 예전 신사 터가 이 산 언덕배기 땅 중에서 제일 평평하거든. 여기에 선 천지역민들이 들어와 살게 된거야. 이 땅은 평안북도의 다른 지역 사람도 들어올 수 없 었고 오직 평안북도 선천지역 사람만 들어와 살 수 있었어” 이것이 해방촌 선천군민회 의 시초다. 해방 직후에서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해방촌 주민들의 중심은 지연적인 것이었다. 크게 는 이북이라는 지연으로, 작게는 평북 선천지역 출신이라는 점이 사람들을 뭉치게 만들 었다. 초기에 선천 지역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한 선천군민회 자리에는 선천 사람들 이 아니면 입주가 불가능할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한편 해방 전에 이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가졌던 공통점, 북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11-
  12. 12. 해방촌 신택리지 정치 성향은 이들의 지연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지연과 정치 성향을 결합시키 는 것의 중심은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는 멋도 모르면서 좌익풍조에 들떴던 서울의 세정이 한심스러워 “빨갱이 놈들 맛좀 봐라”고 했던 당시 반공의 제일선 투사들이었다. 그들을 두고 뒷말도 많았지 만 그들로서는 빨갱이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빨갱이를 없애야지 두고 온 고향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용감했다.”유신 체제 하에 있던 1975년, 동아일 보의 서북청년회를 추억하는 기사 중 일부다. “서북청년단이 여기서 조직이 돼 가지고 젊은이가 나쁜놈 빨갱이들 잡아 족치고 갖다 가 몽댕이 치고 그런 데가 바로 여기 해방촌이 유명했어요. 여기 해방촌 하면 시라소니 도 왔다가 벌벌 떨고 갔다든지. 그러니까 빨갱이들이 얼씬도 못했어.”47년 해방촌으로 들어왔다는,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는 해방촌 할아버지도 서북청년단을 그렇게 추억한 다. 당시 서북청년회는 선천군민회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근거 로 철저한 반공활동을 전개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이 건물에서는 당시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얻어 맞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들은 해방전 월남인들의 상당수가 반공이나 친일경력이라는 정치적 요인에 의해 남한으로 내려온 경우가 많았 다는 점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월남민의 교회, 해방교회 “우리 교회는 땅끝까지 선교하기를 원합니다. 이 땅의 끝이 어디겠습니까? 복음이 들어가야 할 땅 끝, 바로 북한이 아니겠어요? 우리의 선교 목표는 북한입니다. 우리 교인들의 고향, 저의 고향인 북 한에 복음을 들고 들어갈 그 날을 준비하며 기도 하고 있어요." 신의주가 고향이라는 이승하 목사의 말이다. 적 수공권 해방촌으로 온 사람들이 그들 손으로 직 접 지은 교회가 해방교회다. 해방촌 사람들은 해방촌의 제일 높은 곳에 교회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전쟁으로 부모나 남편을 잃은 사람들 <해방교회. 해방촌 오거리와 더불어 해방 을 위한 모자원을 설립하여 마을을 꾸려나갔다. -12- 촌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13. 13.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이북사람들이 지금은 빨갱이들이라고 나쁘다고 하지, 이북 사람 머리가 이남 사람 머리보다 더 좋아요. 이북 사람이 나오면, 꼭 학교 세우고 교회 세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북에서 내려온 할아버지의 말이다. 교회는 이북 사람들의 중심 이 되어 한때는 학교이자 마을회관이자 반공 정신을 다지는 곳이었고, 지금은 여러 지 방에서 몰려든 해방촌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주는 공간이 되고 있다. 담배 마는 해방촌 사람들 50년대, 길에서 주운 담배꽁초에 직접 제조한 담뱃잎을 섞어 넣어 만든 가짜담배(일명, 야매담배)는 해방촌 사람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심지어 주민의 80%가 사제연초제조업 에 종사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요즘 담배가 맛이 없는 이유를 따져 조사했더니 해방촌에서 사제 연초를 제조하던 무리가 잡혔 다는 소식이 나온 가십거리 기사 (동아일보1961.7.19_)> 47년 해방촌으로 들어왔다는,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는 해방촌 할아버지도 한때 담배를 말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배를 한 손에 쥐기만 하면 늘 한 갑 분량인 스무 개피가 잡혔다는 할아버지다. 담배 마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구성지다. “담배를 첨엔 이렇게(손으로) 말았죠? 그런데 그게 발달돼서 이렇게 담배가 (기계에) 요렇게 들어가면 또르르륵 말리잖아? 풀칠을 여기서 쏘로로록 해주고 저기서 담뱃대를 쪼오오옥 땡 기면 한 열 가치(열 개피)가 나와. 그러면 여기서 똑 잘라, 칼로. 그럼 그걸 갖다가 딱딱딱딱 갑을 만들어서, 흰 갑을 만들어서 그걸 파는데 그 담배가 그래서 ‘가라’라 그랬어. ‘가라 담 배’.(‘가라’는 일본어로, ‘가짜’라는 의미다) 불법임에도 해방촌 사람들은 억척같이 담배를 말았다. “담배말이할 때도 그걸 막 전매청에서 와서 단속해 갔어. 그 와중에 여자들이, 여기 해방촌 사 람들이 이북에서 나왔으니까 여자들도 독했어. 전매청 남자의 복부를 잡고서 늘어지면서 그 물건, 하이고 이 물건 다 놔주라고 그거 다 들고가면 나 죽는다고, 모두 다 달려들었어.” 때로는 전매청 담배보다 싸고 질이 좋았다는 평을 듣는 해방촌 담배다. 해방촌 골목길 에는 담배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며 국가 재정을 위 해 전매청에서 나오지 않은 담배들을 강력하게 단속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해방촌의 -13-
  14. 14. 해방촌 신택리지 주된 생업은 스웨터를 만드는 것으로 바뀐다. <신흥과 쇠락> 60년대에 들어서며 해방촌에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일자리와 자식 들의 교육을 위해 올라오는 사람들이었다. 집값이 싸면서도 일거리가 많은 해방촌으로 몰렸던 것이다. 다닥다닥 붙은 천막들과 슬레이트집들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여자들은 미싱을 돌리고 남자들은 그 스웨터를 남대문에 내다 팔면서, 이북사람들의 마 을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신흥이라는 이름으로 길을 만들고 시장을 만들며 새로 운 도약을 꿈꾸는 시기였다. 해방촌 산업 요꼬 박정희 정부에 의해서 가짜담배를 못 만들게 된 뒤, 60-70년대는 '요꼬'라고 불리운 스 웨터 가내수공업으로 해방촌이 번창한다. 당시 봉제업에 종사하셨고 지금까지도 봉제일 을 하고 계신 임광해님과 거성미싱의 황성웅 사장님을 만나뵙고 얘기를 들었다. <신흥시장 안에서 수선집을 하 고 계신 임광해님> “나는 항상 사람들 보고 그래요. 자기 인생을 살으라고. 우리 며느리 한테도 그래. 자기가 가 장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그거만 하면 돼.” 임광해님은 신흥시장 안에서 간판 없는 수선집을 하고 계신 분이다. 임광해님은 처음 해방촌에 와서 신흥시장의 몇 안되는 가게를 돌아볼 때부터 유난히 눈에 띄는 한 분이 -14-
  15. 15.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언제나 볼 수 있도록 시장 길을 마주 보고 앉아서 수선을 하시고 있었다. 임광해님은 해남에서 태어나 60년대 초 광주에 있는 양재학원에 다니다가 양재기술을 배운 뒤 고향 해남으로 다시 돌아온다. 당시 ‘상록수’라는 농촌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 고, 해남군에서의 양재 교육을 임광해님이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방학중인 학교의 교 실을 빌려 양재기술을 가르치다가 서울에 올라온 건 66년.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기 힘들 것이라 판단한 어머니가 서울로 중신(중매)을 넣었던 거라고 한다.“우리 막내(본인)는 시골에서 농사 못 지으니까 서울 보내서 편하게 살려야 하겠다라는 심정으로 서울에다가 중신을 넣었던가봐.”그렇게 결혼을 했고, 서울로 올라 와 해방촌에서 살게 되었다. 해방촌에는 어떤 연고도 없었지만 집을 구하다 보니 이 동 네가 가장 쌌기 때문이었다. 처음 살던 곳은 지금의 남산 3호 터널 근처였다. “그때 해방촌은 다 천막집. 그럼 이렇게(손동작을 하면서) 기어들어가야 해. 기어들어가서 보 면 미싱 놓고 바느질하고. 그땐 서울은 다 이렇게 천막집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천막집으로 기 어나오나보다 했지. 삐딱구두 신고 왔다 갔다 하는 아가씨들도 아침에는 천막집에서 나와서 천막집으로 들어가더라고. 아 서울은 이렇게 사나보다. 그래도 천막집이지만은 내부는 들어가 면 넓어요. 들어갈 때만 기어 들어가는 거 같지 그 안에는 넓어요. 공장을 할 수 있을 정도 로.” 그렇다면 이북에서 오신 분들은 어떻게 공장을 차리신 걸까? “그때 공장주인들은 다 어떤 사람들이었냐.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정착해서 자기들이 사업으로 하는 거야. 그럼 사람들이 미싱사도 하고 스웨터 짜는 일도 하고 그러면서 공장을 이뤄 사는 거에요. 처음에는 기계 한 대 놓고 마누라 보고 너는 미싱 해, 이러면서 밤새도록 만들어 갖고 팔면 수입이 생기잖아. 그럼 실 사고. 그 담에 또 만들어 팔고. 처음에 3장 갖고 갔던 게 5장, 10장 늘어나서 인원을 쓰게 되니까 공장이 커지고, 그래서 또 사람들을 고용하고. 그래서 그 물건 들이 다 어디로 나가냐 하면 남대문이랑 평화시장. 그래 가지고 부자가 됐던 거야.” 하지만 임광해님은 연년생인 아이들을 키우느라 봉제공장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중동에 왔다갔다 하더니 우리집 양반이 몸에 병을 얻더라고. 그래서 일손을 놓았어. 일을 못 하고 내가 이제 이 수선으로 일을 돌렸지. 봉제공장 하는 사람들이 나보고 봉제공장에 들어와 서 일을 다시 하라고 그랬어. 그렇지만은 애들을 어디다 놔두고 거기다 들어가. 연년생인데 할 수가 없더라고. 집에서 이렇게 해도 푼돈은 되고. 거기 가서는 일은 안하고 집에서만 했 어.” 큰 돈은 못 벌었지만 본인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시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하루 종일 -15-
  16. 16. 해방촌 신택리지 앉아서 그렇게 일하시면 힘들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시시때때로 쉬잖아요. 천직으로 알고 해요. 즐기면서 해요. 수선도 이렇게 당신들하고 얘기하 면서도 다 끝냈잖아. (이 일을)언제까지 하게 될는지는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을때까지는 하 리라 생각하고. 나는 항상 사람들 보고 그래요. 자기 인생을 살으라고. 우리 며느리 한테도 그 래.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그거만 하면 돼.” <황성우님이 수리할 미싱 앞에 서계신 모습> 해방촌 봉제산업에 대한 이야기는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미싱가게 사장님이신 황성우 님(66)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이 곳은 미싱을 판매하고 수리하는 곳이다. 황성우님은 1948년생으로 지금은 삼팔선 이북인 강원도 철원이 고향이다. 전쟁 전 교장 선생님이신 아버지가 사상문제로 노동당사에서 처형을 당한 후 전쟁이 나자 피난을 오 던 길에 해방촌에 정착하게 된다. 1960년대 초에 둘째 형이 종로에 있는 파고다 미싱에 서 미싱 수리일을 배우게 되었고 그 일을 배운 형이 해방촌 오거리에 미싱가게를 차리 면서 일을 같이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황성우님은 미싱일을 하기 전에 담배말이 일을 하셨다고 한다. ”이북에서 피난온 피난민들이 처음에 돈벌려고 담배말이 사업을 하거든. 당시 전매청 담배보 다 싸고 질이 좋아 인기가 많았지. 그래서 얼마나 동네 전체가 담배에 매달렸는지 담배냄새가 동네에 진동을 했어. 그렇게 담배산업이 잘 되니 국가에서 가만둘 리가 없지. 단속이 대대적 으로 나왔어.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담배사업을 못하고 스웨터로 생업을 바꾼거야 “ 담배말이와 스웨터를 만드는 것은 둘 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노동력 집약 사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진 게 몸뚱이 뿐인 해방촌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스웨터 를 만드는 게 초기 자본과 기술이 더 필요해 담배말이 사업이 성행했던 것이지만, 박정 -16-
  17. 17.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희 정부에 들어와 집중단속을 하자 자연스레 봉제공장으로 주 사업이 옮겨가게 되었다. 그래서 황성우님 형님이 봉제공장이 많은 해방촌에 가게를 시작하게 됐고 거기서 황성 우님도 미싱일을 배우게 된 것이다. 봉제공장이 많아지니 미싱사가 외부에서 많이 들어 왔고 서로 일을 배웠다. 지금 얼마 안남아있는 봉제공장들은 그때 일을 배운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봉제공장은 점차 사양산업이 된다.“자재값은 올라가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의 임금은 올라가지 않으니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고, 중국이 싸다는 이유로 중국 물건 에 의존하게 되거나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니 한국의 봉제공장은 일이 없어 문을 닫게 되는 거지.” 황성우님은 자신이 30~40년동안 배운 일을 누군가 배우기만 하겠다면 2~3 년 동안 가르치고 퇴직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배울 사람이 도통 없다고 안타까워 하셨 다. 한석호님 이야기: 해방촌의 6-70년대와 해방촌 2세 “해방촌의 영향이 저한테 컸다고 생각을 해요. 아주 컸다고 생각해요. 돈 없어서 허덕이고 배 곯고 하는 역경, 참 없게 살면서도 서로를 도와가는 이런 모습, 그런 게 학생운동을 하고 노 동운동을 하는 데 밑바탕이 된 거야.” 어린 시절 해방촌으로 와, 해방촌에서 자라온 해방촌 2세.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늘 시대의 최전방에 있었다. 지금은 전태일 재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석호님(50)이다. ㅇ험난한 가족사 한석호님의 아버지는 건설노동자였다. “진짜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다 얘기를 해. 동네 분들 다 아버지보고 ‘참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고. 진짜 성실했어, 내가 보기 에도. 진짜 성실했어. 하루도 쉬지 않고, 일요일도 쉬지 않고.” 중동붐이 일었던 70년대 중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중동으로 나가려 무척이나 노력하지 만 하지만 1년 내내 번번이 떨어지고 만다.“그래서 한 일 년 동안 그것 때문에 되게 속상해 하셨지. 저희 아버지가 막 속상해하는 게 그거 해서.. 제가 막 화장실에 앉아 가지고, 똥 누 다가 워낙 속상해서 혼자 울었어요.” 아버지가 떨어진 이유는 연좌제 때문이었다. 북으로 간 이복 할아버지가 걸렸던 것이 다.“한 일 년 가까이를 중동에 갈라고 무지하게 노력을 했는데 그게 안 됐어. 작은 할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가지고. 그래서 중동에 못 나간 거지. 그때만 해도 중동 나가는 사람들 다 그런 심사를 했거든.” -17-
  18. 18. 해방촌 신택리지 한석호님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은 경북 예천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지역의 유지였지만, 술을 좋아해 둘째 아내를 만들고 흥청망청하다 물려받은 땅들 을 팔고 가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장남이었던 한석호님의 할아버지는 가산을 복구하기 위해, 장돌뱅이 노릇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국수장사를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결국 증조 할아버지가 말아먹은 땅을 일부 복구하지만, 어느 날 빨치산들에게 습격당해 허무하게 돌아가시고 만다. “49년이지. 49년인데 50년 전쟁이 나기 전에... 어느날 산사람들이 내려왔어요. 그래가지고 저 희 할아버지가 밥 먹고 있는데, ‘잠시만 얘기좀 합시다.’, 해서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 그 마당 에서 죽창으로 저희 할아버지를 찔러 죽였던 거예요. 그랬는데, 문제가 뭐냐면은 형제 중에 하나가 북으로 간단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는 그렇게 산사람들한테, 소위 말하는 빨치산들한테 그렇게 죽었는데, 동생은 북으로 가고. 연좌제가 그 북으로 간 동생 때문에 걸리는 거야. 하여튼 연좌제라는 게 그랬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백방으로 중동에 갈 방법을 찾아 헤맨다. 그 와중에 친척으로부터 좋 은 소식이 들려왔다.“다행히 그 친척 중에 누가 검사가 있었어. 그 사람이 보증을 서준 거야. 그래서 하여튼 갔어.” 리비아, 레바논, 쿠웨이트. 아버지는 9년 동안이나 중동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하 지만 더운 나라에서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인지 돌아오신 뒤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만다. <한석호님 어린시절 사진. 뒤쪽으로 막 공사가 끝난 남산3호터널과 남산교회가 보인다> 한석호님은 아버지를 중동으로 보낼 때를 회상하다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18-
  19. 19.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아버지를 배웅한다고 버스를 타고 가는 거야. 588번이었지. 서울역에서 공항까지가는 버스가 있어요. 한 시간 넘게 걸렸지. 아버지는 수속해야할 게 있으니까 따로 먼저 갔던 거고. 버스에 서 가는 내내 울었어 내가. 남들이 있으니까 엉엉 울지는 않고. 자리에 앉아가지고 계속 눈물 을 흘린 거야. 그땐 중동 나가면 잘못하면 죽는다 그러고 막 그렇게 덥다고 어른들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걸 들으면서, (아버지가)왜 그런 데 가가지고 저렇게 고생을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계속 운 거지. 울면서 어떤 생각을 했었냐면 난 크면은 정주영 만큼 돈 많이 벌겠다, 이런 생각을 한 거지.” 왜 아버지가 저런 고생을 해야 되나, 하는 의문은 훨씬 더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서야 풀리게 된다. 우선은 어린시절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ㅇ어린시절, 해방촌 배고프고 가난하지만 서럽지는 않은 어린시절이었다. 남산과 개천, 진흙탕과 공사장을 신나게 오가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남산에 사람들이 하도 들어가 사니까 남산을 다 철조망으로 막아버렸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철조망 넘어가가지고 놀고, 아니면 밑으로 기어 들어가고, 물 내려오는 하수관이나 그런 데로 들어가가지고 놀다 오고 그랬어요. 남산을 가면 지네를 잡아요. 또 이런 여름이 되면은 마를 캐고. 남산에도 산마가 있거든요. 지 네는 잡아가지고 한의원에 갖다주면은 그 뭐 일원 이원, 아니면 몇 마리 잡아주면은 십원 이 십원 하면은 고거 갖고 건빵 사먹고 이러는 거죠. 그렇게 하고 마는 캐서 그냥 씹어먹든가 아 니면 집에 와서 쪄가지고 같이 먹는 거야.” 지금의 눈으로 보면, 무엇보다 놀이가 생산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책이든 영화든 노래방이든 지금 시대의 놀이는 대부분이 무언가를 소비하는 일이 아니던가. “비가 올 때는 개천을 뒤지는 거야. 그러면은 못, 녹슨 못, 그러니까 쇳덩이들. 고철 되는 것들 을 다 줍는 거야. 그 다음에 빈 병 같은 것들을 주워서 파는 거죠. 그러다 운 좋으면 일원짜 리도 많이 나왔어요. 비 오니까 그게 어쩌다 쓸려 오는 거지. 일원, 오원, 십원. 그런 건 땡잡 은 거죠. 그런 거를 자주 했죠. 많이 했어요.” 그리고3호 터널 공사할 때. 거기 있는 집들을 다 헐었어. 거기에 동네 꼬마들 다 모여가지고, 나이 든 사람들은 다 새까맣게 몰려가지고 벽돌을 차곡차곡 하나씩 깨는 거야. 그러면 그 옆 에서 (벽돌을) 썰어서 흠 안 나게 (분리)하는 거지. 그 다음에 콘크리트 뭉치들이 있으면 막 깨 가지고 철근 있는 거 모으고, 그래서 철근은 고물상 팔고. 그 다음에 벽돌은 깨거나 버려 지면 자재로 갖다 주는 거야. 되게 힘들어. 한 두 시간 정도 깨면은 기껏해야 스무 장 서른 장 정도 했던 것 같애. 그래. 거기 갖다 주면은 한 장에 그때 십오 원이었나. 그래서 그거 받 아가지고 과자 사 먹고 이러는 거지.” -19-
  20. 20. 해방촌 신택리지 <남산3호터널 공사현장. 깎 여나간 산자락에는 한때 벽 돌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는 일 중 하나는 동네 형에게 붙들려 애꿎은 싸 움을 하게 된 일이라고 한다. 해방촌으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와 가지고 동네 나가서 논다고 나갔는데, 동네 형들이 “야 임마, 너 일로 와봐.” 이러는 거야. 그러더니 어떤 애랑 키를 재. 키를 재니까 나랑 좀 비슷해. 그러니깐 골목 안에 나랑 딱 넣고, 둘이 싸우라는 거야.(웃음) “너 얘랑 한 번 싸워 봐.” 하고. 근데 나랑 싸웠던 애가 나중에 보 니깐 내 둘째의 친구가 되는 거야, 동네 사는 앤데, 싸우라니까 뭣도 모르고 싸운 거지. 싸우 라니까. 그냥 뭐 우격다짐 싸웠죠. 근데 걔가 코피가 먼저 났어. 걔가 울었어. 그래서 나한테 걸었던 그 형은 인제 돈을 걸었으니까(돈을 땄고.) 하이튼 뭐 달동네고 짖궂은 애들이 많으니 까 그런 일들이 벌어졌어요.” 지금에야 웃으며 이야기해도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꼬마 애였던 그때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한석호님은 그 런 경험들이 나중에 역경을 버틸 힘이 되었다고 이야기한 다. “이 동네가 험악한 동네잖아요. 달동네. 옛날에는 해방촌 산 다 그러면은 다 깡팬줄 알았으니까. 다 그런 게 아닌데. 착한 친구들도 많고 그러는데. 근데 나는 그런 친구들하고 어울리 면서 개구장이처럼 놀고 고등학교 때 술담배 하고, 이렇게 했던 것들이 그 이후로 노동운동 하면서 그 역경들, 뭐 감옥 가고 고문 당하고 그 다음에 뭐 돈이 없어 가지고 막 허덕이 고, 막 배 곯고, 그런 것(들을 견딜) 밑바탕이 된 거야.” -20- <한석호님 청소년시절>
  21. 21.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ㅇ해방촌이 키운 운동가 대학은 서울 시립대 도시행정학과로 들어갔다. “들어가가지고 학생운동을 했어요. 데모가 일어날까봐 축제를 하지 말라는 걸, 대학마다 ‘야 이거 거부하자’, 하면서 수업 거부를 하자 하는 싸움들이 벌어진 거야. 그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으니 한 삼십 년 된 것 같네.” 그런데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좀 웃기다. “(축제 전 수업거부를 주도했던)요 과대표 놈이 그러는 거야. 어떤 써클이 있는데, 들어가보지 않겠냐. 여학생도 있다는 거야. 그런데 써클은 소위 말하면 칠공주파, 서울역 다이나마이트. 그런 촌스런 이름을 붙여. 그래서. 난 써클이라 그래가지고 이런 써클로 생각한 거야. 아, 그 럼 하지 뭐. 편하게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에 가보니까 중국집에 앉아 갖고 술 먹고 세미나를 하고 있더라고. 거기서부터 인연이 돼 가지고 학생운동을 한 거예요.” 그리고 그 곳에서야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그토록 성실한 사람인 아버지가 왜 그렇 게 고생하고 불행해야하는가.’ 의 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달 써클인 줄 알고 가긴 했지만, 거기 가서 책 도 읽고 세미나도 하고 그런 분위기에 동화됐어. 그러다 보니까 노동자들이 그렇게 사는 게 사회 적인 모순이라는 거다 하는 걸 확인하면서 머리 가 딱 깬 거지. 아, 이런 거였구나. 그 전까지는 계속 몰랐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성실하게 사는데 왜 이런 걸까. 고등학생 때까지는 그냥 그렇게 생 각만 했던 거지.” 그렇게 운동을 시작하고, 자연스레 학교를 <한석호님 청년시절> 졸업했다. 87년 6월 항쟁때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기도 했다. 6월이 지나고, 명동성당 투쟁동지회를 만들던 와중에 방위 소집을 받게 되는데, 훈련소 입대 당일 누군가가 찾아왔다. “아침에 누가 툭툭 깨우더라고. 한석호씨 맞냐고. 예. 그랬더니 잠깐 어디로 가재. 어. 경찰이 구나. 그러면서 간 거지. 가가지고 저기 장안동 대공분실 그쪽에 끌려가가지고 조사 받고 얻 어 맞았어. 근데 감옥으로 집어넣는다는데 너무 신난 거지 나는. ‘야아, 이거 방위 안 가도 되 겠다. 차라리 감옥 가서 사는 게 낫겠다.’ 해가지고, 그래서 구속이 됐어. 그런데 노태우가 대 통령이 되면서 대대적인 사면을 해요. 감옥에 있던 수만 수천 명들을 다 풀어줘. 대통령 당선 되고 나서 얼마 있다 재판을 받으니까 초범이기도 하니까 집행유예로 풀어줬고, 나오자마자 인천으로 가가지고 노동운동을 시작한 거죠.” 학생운동을 할 때에도 한 번 끌려가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 -21-
  22. 22. 해방촌 신택리지 “4학년때 한 번 끌려가가지고 고문을 당하죠. 보안사. 그 유명한 서빙고에 한 번 끌려가요. 끌 려가는데 미리 낌새가 안 좋았어요. 동기들 세 명이 수배중이었거든. 이걸 불어라 하는 거였 지.” 물고문까지만 받았다는 이야기가 정말 담담하다. “하루 동안, 전기고문 가기 직전에 물고문까지만 받고 나왔어요.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까 저희 큰어머니의 친척 중 누가 보안사에 뭔가 대령인가 있었대요. 여기에다 이야기를 한 거야. 그 때는 고런 식으로 잡히면 대체로 고문을 다 당했었어요. 고문을 어디까지 당하고 나오느냐, 불고 나오느냐 안 불고 나오느냐 이런 거였는데. 당연히 저는 불지 않고 나왔죠.” 노동운동을 하면서는 주로 선봉대를 담당했다. “그때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하면 박살 내고 이런 때였는데, 회사에서 구사대라는 걸 만들었 어요. 회사직원들을 갖고. 지금으로 치면 용역들인 건데, 노동조합을 깨는 역할을 하는 거지. 관리직, 주로 남성들 위주로 해가지고 만들었던 건데. (그래서)노동운동에서 노동조합을, 민주 노조를 지키기 위해서 무장을 해야한다. 방어를 위해서 무장을 해야한다, 해서 선봉대라는 것 을 만든 거지.” “뭐 정당방위대 선봉대 이런 이름으로 해가지고 창원 인천, 뭐 전국 곳곳에서 만드는데 인천 에서 제가 그 역할을 한 거죠. 좀 껄렁껄렁해가지고 겁도 없고 이러니까. 하다보니까 자연스 럽게 책임자를 하게 됐어요. 그래가지고 2001년도 대우자동차 투쟁으로 세 번째 감옥 가기 전 까지 노동운동 내에서 그 책임자 역할을 해요. 우리들 표현으로는 ‘야사’라 그러지. 야전사령 관 역할을 하는 거죠. 전술을 기획하고 노동운동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 지휘를 하는 거죠.” 운동을 하고, 고문을 받고, 선봉에서 싸우는 일을 별다른 댓가도 없이 그것이 옳기 때 문에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보통 사람의 보통 마음가짐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한석 호님은 어째서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물어봤다. “해방촌의 영향이 저한테 컸다고 생각을 해요. 아주 컸다고 생각해요. 돈 없어서 허덕이고 배 곯고 하는 역경, 참 없게 살면서도 서로를 도와가는 이런 모습, 그런 게 학생운동을 하고 노 동운동을 하는 데 밑바탕이 된 거야. 공동체라고 하는 게 없게 살면서도 서로들 도와가는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익혔던 거. 다들 가 난하니까 쌀이 떨어질 때가 많았어. 없으면 옆집 가가지고 빌리는 거예요. 그러다 또 갚고. 그 땐 그냥 다 이웃이었지. 대문 다 열어 놓고. 그때야 뭐 대문을 안 닫아놔도 훔쳐갈 것도 없는 신세니까. 아마 해방촌에서 그렇게 겪지 않았으면은 선봉대 담당을 못했을 것 같아요. 선봉대 담당이라 는 게 하이튼 백골단들 하고, 막 그 파이프 갖고 내리치고 두들겨 패고 맨날 맞고. 끌려가고. 그런 거였는데, 남들 보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별 거 아니다 하고 자꾸 생각했던 게, 어릴 때 그렇게 치고 박기도 하고, 이러면서 살아왔던 게 영향을 준 거 아닌가. 실제로 많이 준 것 -22-
  23. 23.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같아요. 성격 형성 되는 데.”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금속연맹, 민주노총 조직실장, 진보신당 사무총장을 거쳐 지금은 전태일 재단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요즘은 외국의 어린이들을 돕는 데 도 많이 관심이 간다고 한다. “네팔에다 초등학교 만들라고. 노동운동 하면서 같이 했던 사람들이 뜻 맞는 사람들이 방글라 데시에 초등학교 하나 세웠고, 개교 했고, 학생들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올 하반기에는 네팔 에다가 학교를 한 개 내지 두 개 그리고 또 내년에는 또 딴 나라에다가 지으려고 해요.” 거미줄처럼 얽힌 해방촌 사조직 이야기 해방촌은 타지인들의 땅이다. 사상과 종교 문제로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전쟁 후 삶 의 터전을 잃고 무조건 서울로, 서울로 온 사람들, 돈과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모여든 지방민들이 해방촌의 주민이 되었다. 객지에 나오면 외롭고 비빌 언덕이 필요한 건 예 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특히나 해방촌에서는, 무수한 사조직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지금도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1960년대부터 해방촌에 살았던 신흥시장의 박일성님에게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일성님은 신흥시장에서 국수를 직접 만들어 파는 일을 50년 가까지 해오 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가 여기서 국수장사했어. 장사하다가 힘들다고 올라오라고 그러더라고. 먹고 살기 위해 올라왔지. 그때는 어려운 때니까 없으면 다 국수 먹고 그랬다고. 밥먹으려면 쌀이 비싸 니까. 그때는 장사가 잘 됐지. 먹는 장사는 잘 됐어.” <신흥시장에서 일성상회라는 국수 가게를 하고 있는 박일성(72)님과 직접 만든 국수> -23-
  24. 24. 해방촌 신택리지 “이 동네가 모임이 많아 단체모임. 여기도 향우회가 있어. 경상 향우회, 전라도 향우회, 충청향우회, 강원도 향우회 이렇게 있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향우회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789라는게 있어. 47년,48년,49년 출생자 모임. 한 2,30명은 돼. 그 세대가 돈 잘 벌었거든. 그 리고 남산 친목회, 먹는 친목회, 달동네. 명칭이 여러 가지 많아 이동네에. 유관단체도 많아. 새마을. 부녀회. 바르게 살기. 체육회, 자율방범 같은 거. 난 새마을하고 자율방범하고 체육회 하고 청소년육성회 4개만 하지만 그거 보다 더 하는 사람도 있어. 동회도 10개 가까이 되고, 모임도 대여섯 개 되게 나가는.” 각 향우회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축구 대회도 한다고 한다. “향우회 조기축구 5개 단체가 운동장 빌려갖고 일년에 한번씩 시합하잖아. 그런게 있어. 강원,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이북 이렇게 5팀이 매월 5월말에 정기축구친선대회를 해.” “단체가 엄청 많아. 여기만큼 잘 되는 데가 없어. 그러니까 (소식들을) 다 알지. 잔치 한 번 하 면, 누가 돌아가셨다 하면 그 길로 사람이 엄청 많이 모여. 남들 가면 품앗이니까 나도 가고. 딴 데는 사람이 없어 걱정인데 여긴 한번 가면 3,400명 이상은 보통 모인다니까.” 박일성님의 경우 유관단체들 외에도 달동네라는 모임을 하고 있었다. “달동네는 그냥 동네 친목모임이야. 그냥 만나서 밥 먹고 술 먹고 하는거지.”하지만 그냥 동네친목모임 치고는 무려 1988년부터 지금까지 쓴 장부가 있다. <박일성님이 88년도부터 참여하고 있는 친목모임 ‘달동네’ 장부. 나무 돈통은 박일성님이 처음 가게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으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 -24-
  25. 25.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해방촌은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야. 식당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 뒷통수만 봐도 누구인 지 다 알 수 있어. 앉아 있다가 서로 불러 갖고 숟가락 하나 놔주면. 항상 그냥 못 가. 늘 식 사하고 얘기하고.” 결국 말은 사용하기 나름이다. 한때 해방촌과 해방촌 사람들의 가난을 ‘달동네’라 부르 던 걸 모임 이름으로 쓰면서, 오히려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라 한다. 누군가는 해방촌이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니라고 한다. 그때의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 일 테다. 하지만 해방촌은 여전히 달동네다. 여전히 서울의 높은 곳에서 달이 잘 보이 니 달동네이고, 여전히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다. 해방촌의 부흥과 쇠락을 함께 한 신흥시장 해방촌을 이야기하는 데 신흥시장을 빼놓을 수는 없다. 해방촌과 흥망을 함께한, 해방 촌 역사의 상징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흥시장이 만들어진 것은 1960년대 초였다. “전부 하꼬방이었어 여기가.”신흥시장의 시 작부터 이곳에 있었던 이춘경님의 이야기다. 신흥시장을 만든 것은 이춘경님의 매형이 었다. “우리 매형이 군대에서 예편한 사람이야.(장교 이상이 전역하였을 때 ‘예편하였다’ 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그래가지고 이걸 전부 우리 매형이 매입하는 형식으로 했어. ‘맡겨라 나한테. 전부 다 넘겨라. 다 넘겨서 이렇게 집을 짓자.’(라고 했던 거지.)” <신흥시장의 내부. 슬레 이트 지붕에 덮여 낮인 데도 어둑하다.> 그렇게 해서 판잣집들을 다 허물고 시멘트 건물들을 여러 채 지은 뒤 지붕을 이어붙인 게 지금의 신흥시장이다. “내가 여기 딱 들어오니까 재산이 25만원 있더라고. (그 돈으 로) 용산시장에서 한 짐 이고 들어왔어. 마누라는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하나 들고, 나 는 봇짐을 해가지고. -25-
  26. 26. 해방촌 신택리지 여기 이북사람들이 그 때만 해도 많았거든. 그니까 뭐 안면으로 해서(동향 사람들에게 안면으로 장사해서) 그냥 싹 떨이를 했는데, 28만원이 되더라고. 그 때 3만원이 지금 30 만원이 넘는거거든.” 지금은 침체된 신흥시장은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번성했다. 지금은 휑한 시장 내의 골목골목은 그 당시엔 노점상으로 가득했고 사람들이 장을 보는 오후 시간 은 사람이 너무 많이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번성했냐면, 한 마디로 천원 짜리는 세기가 귀찮을 정도였어. ” 이렇게 사람들이 신흥시장으로 몰렸던 건 해방촌 사람들이 주로 요꼬(스웨터 제조업)로 먹고 살았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노동 집약적인 봉제공장은 좁은 공간에서 놀랍도록 많은 사람들이 일했고, 그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는 곳이 신흥시장이었던 것이다.“3시부 터 6시까지는 걸어다닐 수도 없었어. 너무 많아서. 5,6시 되면은 공장에서 일하는 아줌 마들이 나물 삶아 놓은 거 요런 것들 사러 나와. 저녁밥 집에 가서 해먹어야 되잖아. 늦게 나오면 다 팔려버리고 없으니까. 사다가 미싱 옆에다가 놔두고 있다가 저녁에 끝 나면 집에 들고가서 밥해먹는 거야.” 신흥시장에서 수선집을 하는 임광해님의 회상이 다. 그러나 신흥시장은 점차 사양길을 걷게 된다. 기계가 자동화되면서 더이상 봉제공장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손으로 움직이는 건 하나도 없거든. 실 감는 거만 매듭 매어 주는 그거 하나만 있지. 미싱하고. 그러니까 옛날에 한 사람이 열장씩 하면 20명이니까 200장 밖에 안 나왔단 말이야. 죽어라고 해도. 근데 지금은 두 사람이서 하루에 천장을 빼도 저건 기계가 안 멈춰요. 저거(미싱공장) 옛날에 돌릴라 그랬으면 한 16명 있어야 해. 그럼 14명은 어디로 갔느냐? 나간 거야.” <이곳도 한때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사람 들이 빼곡했다.> -26-
  27. 27.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대형마트들이 생기며 점차 시장으로서의 매력도 없어졌다. 게다가 어둡기까지 하니 사 람들이 쉽사리 다니지 않게 된 것이다. “시장 자체가 구색이 안 맞으니까 시장이라는 타이틀도 없어져야 해. 이제 남의 슈퍼보다도 못한 거야.” 이춘경님의 자조 섞인 한탄 이다. 많은 상인들이 구색 안 맞는 시장에서 떠나갔다. 하지만 시장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상점들이 있다. 도깨비 시장이라 조롱당하면서도 거 기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신흥시장이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는 지켜 봐야 할 일이다. 재개발 이야기 1960년대 중반, 토지 정리 사업이 시작되면서 주민들은 자신들이 점유하던 면적만큼 정 부에 땅값을 지불하고 소유권을 갖게 되었다.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도시 조직이 필 지로 구획되게 된 것이다. 1963년 남산 순환도로(소월길)가 건설되면서 그 일대에 자리 하던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되었다. 이로 인해 해방촌과 남산은 남산순환도로를 사이에 두고 경계가 형성되었다. 또한 1970년도 남산 2호 터널, 78년도 남산 3호 터널이 건설 되면서 동쪽의 이태원동과도 경계를 가지게 됨으로, 해방촌의 경계가 현재와 유사하게 정해지게 된다. 1973년 불량주거지에 대한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면서 해방촌에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시가 직접 사업 시행자가 되어서 도로 등의 공공 시설들을 설치 하고 주민들은 구획된 대지에서 자력으로 주택을 건립, 개량하였다. 이러한 사업은 1990년대 까지 이어져 불규칙한 블록은 정형화 되었고 거미줄같았던 가로망은 사람 과 차가 다닐 정도의 폭을 가지게 되었다. 지속적인 재개발을 거친 해방촌에 시간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공간들을 소개한다. ㅇ판자집이 발전한 형태 : 신흥로 20길 39일대, 신흥로 27길 16일대 전쟁 후 부족한 물자와 급격한 인구 집중으로 인해 지은 판자집이 즐비했던 해방촌. 집과 집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고 자연 발생적인 형태로 막다른 골목도 많은 길, 시멘트 벽에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공중변소를 이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ㅇ개량한옥의 흔적 해방 후 전통 주거 양식인 한옥을 새로 들어온 재료(시멘트, 유리) 로 지은 것을 개량 한옥이라고 한다. 몇 몇 개량 한옥이 남아있는데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이 며 지금은 용산 경찰서 특별 관리 구역으로 지정되어 치안상 문제가 되고 있다. -27-
  28. 28. 해방촌 신택리지 ㅇ재개발로 해방촌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빨간 양옥집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면서 유입된 양옥은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 등의 재 개발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던 벽돌집으로 발전 하였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집은 현재 해방촌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주거 형식이고 일관성있는 마을 경관을 만드는 역할도 한다. 해방촌을 떠나는 사람들 “해방촌의 토지 불하과정에서 월남인 중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불하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것은 그들이 통일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월남인들에게는 제 2의 고향이었던 해방촌도 궁극적으로는 임시거처에 불과했던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다.”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해방촌은 타지인들의 땅이다. 나무를 하나하나 베어 판잣 집을 빽빽하게 올리고, 흙길을 밟아 다져가며 해방촌 길을 만든 월남민들 마저 해방촌 은 임시거처에 불과했던 것이다. “해방촌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월남인들이 돈을 벌면 이 지역을 떠난다고 했다. 그래서 지 금은 가난한 사람들밖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 즉, 월남인들에게 해방촌은 제 2의 고향 <해방촌이 생긴 1947년부터 최근까지의 인구변화 그래프. 70년대 초에 정점을 찍었다가 점차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28-
  29. 29.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과 같은 곳이기는 하지만, 잊고 싶은 실향의 아픔과 벗어나고 싶은 가난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석: 이신철, 같은 책) 월남민 이후로 해방촌에 들어온 지방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해방촌은 늘 가난 의 상징 같은 곳이었고, 돈을 벌면 다시 이곳에서벗어 나기를 반복했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사람들이 (봉제)공장에 와서 일을 배웠어요. 여기서 일을 배운 사람들 은 삼양동이나 봉천동이나 낙성대, 그런 데를 가더라고. 공장을 하면 공장내에 미싱사, 시다, 밑 시다, 웃 시다 소시다 이렇게 미싱 하나 돌리는데 사람이 5명이 붙어요. 그래서 벌어먹어. 그러는데 공장이 없어지니까. 고 5명 짤렸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가겄어? 공장 따라 가잖아요. 그럼 이 동네 사람들이 없어지잖아.” 신흥시장 수선집 임광해님의 말이다. 재개발이 진행되며 해방촌에서 밀려난 사람들. 봉 제공장의 기계화에 따라 일자리를 잃고 해방촌을 떠난 사람들.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 고, 특유의 옛 활기를 잃어가 신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해방촌은 점점 쇠락하게 되 었다. <해방촌의 역사도 돌고 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비어가는 해방촌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타지 인들의 땅, 해방촌에 다시금 새로운 바깥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서울의 중심에 있어서, 작지만 저렴한 집이 있어서, 일자리를 찾아서, 공동체를 찾아서, 처음과 똑 닮은 이유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다. 해방촌의 역사도 돌고 돈다. 청년들과 외국인 타지에서 해방촌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 정도로 나눌 수 있다. 4,50년대 해 방후와 한국전쟁 전후로 들어온 유입 1세대(월남민). 6,70년대 서울의 도시화와 급격한 이농 과정에서 들어온 유입 2세대(지방민).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 들어오고 있는 유 입 3세대. 유입 3세대의 주역이 청년들과 외국인이다. 서울 내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싼 집세, 그러면서도 서울 중심가에 버스로 십여 분 이면 이를 수 있는 교통이 청년들을 끌어당기고, 미군기지와 이태원의 근처면서도 집세 가 싼 곳이라는 점이 외국인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새로운 사조직: 남산골 해방촌, 빈집, 종점 수다방, 수유너머, 서울시티파머스 새마을 협의회, 부녀회, 자율방범회를 비롯한 유관단체부터 달동네 등의 개인 모임, 각 도 향우회까지 거미줄처럼 얽힌 해방촌의 모임들. 그런 해방촌에 청년들이 모여들며 다 -29-
  30. 30. 해방촌 신택리지 시 새로운 사조직이 덧대어졌다. 해방촌에는 아마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는가 싶다. 해방촌이 좋아서 함께한다는 동네 잡지 남산골 해방촌. 모든 사람이 손님처럼 산다는 주거공동체 빈집. 동네 사람들이 편안하게 수다떠는 공간이 되고 싶다는 종점 수다방. 해방촌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간, 수유너머 R/문. 남산 약수터 근방에 텃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 도시농부들, 서울시티파머스. 각각의 모임들이 해방촌을 풍성한 색채로 채워가고 있다. 호랑이 대신 고양이: 남산의 포식자 한때는 호랑이가 뛰놀던 남산. 일제시대와 근대화를 거치며 한국의 호랑이들은 멸종했 다. 그 호랑이들의 빈자리를 지금은 고양이들이 채우고 있다. 현대 남산의 먹이사슬에서 꼭대기에 군림하는 동물은 고양이다. 호랑이가 뛰놀았다는 산에 고양이가 왕이라니 우습지만, 고양이에 의한 피해는 웃고 넘길 수준을 넘는다. 99 년 서울시는 남산에 고라니 4마리를 방사했다. 몸길이가 1m까지 자라는 사슴과 동물. 그러나 이들은 한 해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범인은 고양이들. 고라니의 서식지 근 처에는 고양이의 습격 흔적이 발견됐다. 고라니가 이러니 다람쥐, 청솔모, 꿩 같은 동물 들은 고스란히 고양이의 먹이가 돼왔다. 남산공원관리사무소 측도 "야생동물이 3~4년 전만 해도 꽤 많았는데, 몇 년 새 부쩍 줄었다"고 한다. 해방촌의 터줏대감도 고양이가 되었다. 밤만 되면 해방촌을 배회하는 고양이들. 밤이면 해방촌은 고양이들의 땅이 된다. 해방촌 동물 이야기 해방촌에는 동물들이 유달리 많아 보인다. 반려견을 데리고 외출하는 주민들이 늘상 보 이고, 남산 호랑이의 후손인 고양이는 밤이 되면 해방촌 곳곳을 누빈다. 길고양이와 길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캣맘들의 이야기는 윤자가 쓴 <묘(猫)한 윤자>를 참고할 것. -30-
  31. 31.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해방촌의 오늘 <해방촌 청년 이야기> 해방촌으로 들어온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해방촌에서 활동하는 청년들 활 동들 중 눈에 띄는 몇 개는 다음과 같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인간답게 살기 위한 탐구 를 하는 [수유너머-R],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 라디오 방송을 하는 [종점수다방], 해방촌 청년들이 만드는 마을 잡지 [남산골 해방 촌], 대안 주거공동체 [빈집] 사람들 등이다. 해방촌을 채운 빈집, 빈가게, 빙고 2007년도 한 해 동안 유럽과 아시아를 돌며 자전거 여행을 한 ‘지음’과 ‘살구’라는 부부 가 있었다. 지음과 살구는 한국의 주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자전거 여행에서 환대 받은 경험 속에서 그 고민은 점점 깊어지고 구체화되어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음과 살구는 어떤 방식으로 집이라는 공간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 수 있을지 고민했 고, 그런 고민 속에서 단순한 주거공간을 나눠 쓰는 것이 아닌 함께 사는 공동체 '빈집' 을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해방촌이었을까? 빈집을 처음 연 지음은 그 이유에 대해 “빈집을 만 들 장소를 알아보던 중 해방촌이 경제적, 지리적으로 유리하더라고요. 해방촌은 서울에 서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고 남아있는 몇 안되는 지역이라 비교적 집값이 싼 편이었고, 서울에 가장 중심지에 위치해 교통편이 좋았어요. 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로 이동하기에 좋겠다는 것도 선택한 이유중에 하나가 됐죠.” 라고 밝혔다. 그렇게 2008년 2월 지음과 살구 그리고 그들의 친구 3인이 각자 가진 전재산과 대출금으로 해방촌에 방 세 칸의 전셋집을 계약하면서 첫 빈집이 탄생하게 된다. 빈집은 보통의 게스트하우스(Guesthouse)와 마찬가지로 한 집에서 여러 사람이 돈을 내 고 사는 공간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바로 서비스를 해주는 주인이 따로 없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게스트하우스는 손님과 주인이 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방식이라면, 빈집은 구성원 모두가 분담금의 형식으로 월세와 공과금, 생활비를 나누어 산다. 그렇기에 공간을 구성하는 모두가 손님이자 곧 주인이며,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니 구성원이 누구냐에 따라 규칙도, 문화도 모든 게 변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31-
  32. 32. 해방촌 신택리지 <최초의 빈집인 아랫집부터 현재의 빈집들.>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빈집은 손님들의 집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라고 불린 다. (이하 <하람의 빈집 리포트> 참조) 종점수다방 후암동과 해방촌을 연결짓는 경계 혹은 연결선인 108계단 앞에 종점수다방이 있다. 20 여년전 결혼하면서 해방촌 주민이 된 황혜원 대표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몇 해 전에 이태원2동과 해방촌 그리고 후암동 곳곳을 일부러 돌아다녀야 했던 황혜원 대표 의 눈에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32-
  33. 33.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은 하나같이 국공립어린이집이 너무 부족하여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교 육문제를 풀면서 엄마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고, 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한 공간의 필요 성을 절감했다. <종점수다방의 벽화작업에 신택리지 조사원들도 함께 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곳이 엄마들과 아이들이 수다를 늘어놓을 수 있는 종점수다방이다. 그들은 매주 모여 강좌도 열고 바느질도 하고 자서전도 쓰고 어르신들이 쉴 수 있도록 의자를 만들어 설치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엄마들과 함께 동네 벽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동네 녹색장터를 개최하기도 했다. <녹색장터에서 비정기적으로 여는 벼룩시장인 녹색장터.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아 이들도 판매원으로 나섰다.> 중․고등학생들은 책을 읽고 대화하는 청소년독서토론을 꾸렸다. 수다는 라디오방송까지 이어졌다. 현재 ‘엄마와 딸의 동상이몽’이라는 제목으로, 영화얘기부터 주변 얘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속풀이 수다 방송이 이어지고 있다. 7월부터는 우리마을미디어문화교실 3기를 운영하고 있다. 수업내용은 ‘무작정 15분 라디오 만들기’ 등 실습 위주로 편성하 -33-
  34. 34. 해방촌 신택리지 여 누구나 흥미를 가지고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종점수다방의 대표 황혜원님은 “이번 라디오 교실을 통하여 양육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에 대해 관심 갖지 못하고 친구들도 만나기 힘들었던 엄마들이 서로 어울려 친해 지고, 자신의 이야기, 이웃의 이야기를 맘껏 나누는 재미, 나아가 동네 이야기를 내 손 으로 직접 만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보람을 느꼈으면 한다.”면서“종점수다방이 단순히 엄마와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마을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수유너머 R / 문 수유너머R과 수유너머 문은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고병권, 이진경님과 고전평론가 고 미숙씨와 함께 만들었던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전신이다. 수유+너머는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도 스스로 자유롭게 공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했고, 그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뒤섞여 공부하고 다양한 강연과 저술로 삶을 영위하는 인문학 공동체를 표방했다. 그러다가 2천년대 후반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수유+너머 중 한 곳이 수유너머 R이다. 수유너머R은 현재 생활공동체를 표방하면서 공부를 함께 하고 밥도 함께 지어먹는 생 활을 영위하고 있다. 또한 철학강좌 외에도 나눔밥상이나 요가, 얼마 전 개최한 해방촌 무도회 등 해방촌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러 공연과 행사를 나누고 있다. 수유너머 앞의 작은 입간판에는 그날 그날 무엇을 공부하는지가 올라오는데 고전부터 현대철학까지, 세미나부터 책읽기모임까지 다양 한 공부모임이 열리니 공부를 통 해 자신을 바꾸고 싶은 사람은 언 제든지 수유너머를 찾으면 된다. 이런 수유너머 R의 연구원 한 분 은 연구공간 외에 해방촌 곳곳에 서도 쉽게 만나뵐 수 있는데 바로 해방촌 오거리의 녹지화에 앞장 서고 계시는 박정수 연구원이다. “한강노들섬에서 장애인야학 학생 들과 농사를 함께 짓고 있는데 농 사 지은지 5년 되다보니 자연스레 동네텃밭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종 <박정수 선생님이 작업한 해방촌 빈가게 화분앞에서 웃 고계신 모습.> -34-
  35. 35.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점수다방 옥상텃밭부터 시작해 해방촌오거리의 가게 앞의 화분들을 대부분 관리하고 있어요.” 오거리에서 화분에 물을 주거나 덩굴을 잡아주거나 손질하는 박정수님의 모습은 해방 촌 주민들에겐 매우 익숙하다. 가게 기둥을 화사하게 바꿔놓는 색깔 입히기도 주민이 요청하면 스스럼없이 작업하신다. 책상 속에 갇힌 공부가 아닌 마을사람들과 함께 몸으 로 부딪치며 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수유너머 R의 한 모습이다. 남산골 해방촌 <동네잡지 ‘남산골 해방촌’의 1,2,3,4> 해방촌에서 태어나 자란 학생부터, 홀로 서울에서 자리 잡기가 쓸쓸해 사람을 찾아온 직장인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바로 ‘남산골 해방촌’이라는 동네잡지를 만들기 위 해서다. 이한솔 편집인은 남산골해방촌을 왜 만드느냐는 질문에 “누군가 동네잡지 만들 기에 참여하여 무엇을 얻었느냐 묻는다면 모두 다른 대답을 하겠지만 ‘동네친구’가 생 겼다는 말만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각자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모인 ‘남산골 해방촌’, 그 지속력은 느닷없이 저녁을 같이 먹자며 연락해도 흠이 되지 않을 동네친구를 만나 고, 해방촌으로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에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난 1년여 동안 총 4 권의 남산골 해방촌을 발간했다. 남산골 해방촌은 그 소재가 해방촌과 관련이 있어야한 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고 자유로운 내용을 담는다. 참여하고 싶은 누구 나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유연성은 잡지를 다채롭게 해줬고 그간 총 네 권의 잡지에 서 여러 주제를 다뤘다. 처음엔 동네에 정원을 멋지게 가꾸시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았고, 다음으로는 진행중인 해방촌 예술마을 사업을 전했다. 해방촌에서 꽤 눈에 띄 는 곳에 자리했지만 동네사람들은 그저 궁금해 할 뿐이었던 한 카페를 소개하기도 했 고, 최근엔 해방촌 데이트 코스도 발굴했다. 남산골 해방촌을 읽으면 해방촌이 그냥 사 는 동네가 아닌 ‘우리 동네’가 될 것이다. -35-
  36. 36. 해방촌 신택리지 <해방촌 외국인 이야기>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태원보다 조금 더 저렴한 곳을 찾아 이동했고, 한국이 좋아서 온 외국인들도 해방촌을 찾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많은 아랫동네 HBC 거리에 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외국인 식당들이 만들어졌고, 외국인 학교(센테리얼 크리스쳔 스쿨)를 설립하는 등 그들 삶의 요건들을 하나씩 충족시켜 나갔다. 또한 HBC 페스티벌(음악축제), 힌두교, 이슬람 사원 등 문화와 종교에 이르기까지 해방촌 깊숙하 게 그들이 삶이 결합되었다. 저스틴과 도시농부 “다른 곳이나 동네 안 가고 싶어요. 제 살고 싶은 style이 이런 편한 동네 느낌. 좋아요. 그냥 길에 걸으면 ‘안녕. 아 어떻게 지내~’ ‘오늘 손님이 많아?’ ‘오. 좋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으면 동네 사는 사람들이랑 정말 좋아요. 이 동네 말고 한국 다른 곳에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 어요. 명동에서 그렇게 하면 ‘아~ 어떤 정신병이 있어요.’ 그런 느낌이 나올 거야.(웃음)” 저스틴(Justin Pollard)은 해방촌의 대표적인 외국인 중 하나다. 서울 시티 파머스(Seoul City Farmers)라는 도시농부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신문에도 여러 번 나온 유명인. 한국 말을 잘 하고 성격도 워낙 친근해 해방촌안에서도 인기인이다. 그는 어떻게 해방촌으로 오게 된 걸까? “처음 한국 왔을 때 성북구에서 살았어요. 제가 가르쳤던 학원이 그 근처에 있었어요. 거기서 가르쳤어요. 4년. 거기 살고 있었을 때 캔찮았어요. 북한산 많이 가까이 있으니까. 좀 편하고. Like 창문 밖에 보면 산도 있고. 아름다웠어요. 근데 문화같은 거 많이 없었어요. 전 외국인이 니까. 외국인 음식이나 다른 외국 사람들 많이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도시농업이나 그런 관 심이 많은데 성북구에서 그런 거 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동네 찾아봤어요. 제가 이 동네에서 살고 있던 친구가 몇 명 있었으니까 한 번 구경하러 왔어요. 구경 좀 하러 오고 나서 와, 이 동네 완전. 진짜 좋아요. 진짜 동네인 느낌 나와요. 빌딩들이, Office Building처럼 큰 그런 게 없고 진짜 동네 느낌 나오고 정말 한국 느낌 나오고. 근데 외국인들도 있고 외국 음식도 있고 다른 외국어도 들을 수 있고 그래서 쭉 아 주 다른 거 섞어 있으니까 oh 편해요.” 말이 유창하다. 억양은 아직 어색했지만, 한국적인 뉘앙스가 인상적이었다. 알고보니 대 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한 한국 애호가다. “제가 다섯 살 때 미국에서 태권도 시작했어요. 제 사범님 정말 완벽 전통 스타일. 제 사범님 이 북한에서 태어났어요. 사부님 성격이 정말 very strong. 완전히 힘이 세. -36-
  37. 37.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우리 도장에서는 외국인 사람 <저스틴은 해방촌의 도시농부다> 한국인 사람 상관 없었어요. 다 한국말 조금 배워야 돼요. 다. Like 하나 둘 셋 넷 다섯. 때리기. 품세. 그거 다 배워야 됐어요. 다섯 살에. 그래서 거 기서 열 년(십 년)에서 공부했 었고 그 열 년 동안 뭐랄까 한 국 문화 한국 음식 한국말 조 금씩 조금씩 조금씩, Little bit little bit little bit. 제 머릿속에 남았어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아마 열 다섯이나 열 여섯 살 때, 아. 아시아 쪽으로 가야겠 다(생각했어요). 제 마음이 좀 더 맞아요. 아시아에서. 그런 이유 때문에. 한국말 배웠어요. 미국 대학교에서 동양학 전공했으니까, 졸업하고 나서 한 국에서 오래 살지 짧게 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사 온 거예요.” 저스틴과 그의 모임은 후암 약수터에 텃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다. 묘하게 이들 ‘서울 도시 농부들(Seoul City Farmers)’도 해방촌의 다른 청년 모임들과와 통하는 점이 있다. 각자 구역을 분양받아 자기 밭을 경작하는 기존의 텃밭과는 다르게, 정해진 시간 에 모두 함께 모여 일하는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커뮤니티는 언제나 활짝 열려 있으니,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텃밭 광장’이다. 하지만 이 텃밭과 저스틴의 모임이 언론에 나오자 문제가 생겼다. 남산 관리본부에서 기사를 보고 이들의 텃밭을 불법이라며 나가 달라고 한 것. 하지만 저스틴은 그래도 괜 찮다며 웃는다. 서울 어디든 그에겐 텃밭이 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도 어려움이 있다. 바로 비자 문제. “영어선생님 하고 있어요. 지금도 해야 돼요. 비자 때문에. 크, 비자.”비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동에 있는 학원에서 영어 강 사를 하고 있다는 저스틴. 강사 일은 상상 이상으로 고되다고 한다. “한국으로 이사하 고 나서 you know 학원이나 일반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면 다른 거 할 수 있는 시간 이 거의 없어요. 너무 많이 일 해야 되니까.”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동네 사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동네에서 사는 외국인 들 몇 명 알아요. 거의 다 영어 강사나 대학교에서 영어 가르쳐요. 근데 그 사람들이 거의 다 비슷비슷해요.” -37-
  38. 38. 해방촌 신택리지 그의 말에서 해방촌 아랫동네가 밤마다 외국인들로 붐비는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한국에 서 1년 2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보통 너무 많이 놀아요. 너무 많이 놀아요. 진짜 좋은 생활 아직 안 만들었으니까. 새로운 나라로 이사하면 제일 좋아하는 친구 제일 좋아하는 취미 제일 좋아하는 음식 다 없 어요. 그래서 그 나라 이사하자마자 어우. 이렇게 할 수 있죠. 기쁘고 싶으면 술을 먹어요. 사람들이 한국 오면 거의 다 일 하고 있는 학교에서 다른 외국인이랑 친구가 돼요. 그럼 “아 우리 다 놀아야지!”하고 그래서 술 먹고 club도 가고 많이 나가요.”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울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한국말 배우기 다른 문화 배우는 점보다 제일 어려워요. 제일 어려워요. 한 외국인이 그냥 바 로 한국에 오고 그냥 한 단어도 몰라요. 그런데 학원이나 일반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면 다 른 거 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너무 많이 일 해야 되니까. 그래서 한국말 배우고 싶으면 진짜 어려워요. 많이 어려워요. 한국말하고 영어 되게 달라요. 많이 달라요. 그래서 you know, 정말 한국말처럼 생각하고 싶으면 십 년 필요해요. 작은 년. 일 년 이 년 말고 좀 오래 한국에서 살아야 돼요. 몇 년 지나가고 나서 좀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고 말을 좀 더 쉽게 말할 수 있고. 근데 일반 외국인 사람들이 그런 공부할 수 있는 시간들 이 많이 없어서 보통 그냥 다 ‘한국 말 못해요. 못해요.’ 그래서 ‘맥주 두 잔 주세요.’ ‘감사합 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거만 배운 거예요.” “보통 아마 삼년 이상 지나가고 나서 좀 변하게(돼요). 한국말도 좀 더 배우고. 한국 문화같은 것도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제 생각에는 일반 외국인 그쪽으로 가요. 3년 살고 나 서.” “제 옥상에서, 다 다른 쪽으로 다른 옥상 할아버지들 할머니 다 알아요. 우리 다 옥상에서 뭐 키우고 있으니까 우리 다 좀 얘기 하고 “아! 그 고추 정말 건강해 보여요.” 그렇게 우리 계속 그렇게 말해요. 좀 재밌어요. 하고 그 진성수퍼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많이 얘기 해요. 다른 곳이나 동네 안 가고 싶어요. 제 살고 싶은 style이 이 편한 동네 느낌, 좋아요. like 그냥 길에 걸으면 ‘안녕. 아 어떻게 지내~’ ‘오늘 손님이 많아?’ ‘오. 좋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으면 제 동네 사는 사람들이랑 정말 좋아요. 그래도 한국에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요. 이 동 네 보다.(이 동네가 아니라면) 이 동네 빼고. 명동에서 그렇게 하면 ‘아~ 어떤 정신병이 있어 요.’ 그런 느낌이 나올 거야.(웃음)” 해방촌 밖에서 바라보는 해방촌, 핫 플레이스 해방촌 밖에서 바라보는 해방촌은 소위 ‘뜨는’ 동네이다. 잡지에서는 이태원을 넘어선 핫플레이스라며 맛집과 예쁜 까페들을 소개하는 데 급급하다. 밤이 되면 영국식 펍에 맥주잔을 손에 쥔 사람들이 북적인다. 반면 필리핀 등 동남아 사람들은 영어권 국가 출 -38-
  39. 39.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신 주민들처럼 거리에 나와 노래를 부르거나 축제를 벌이지는 않지만, 해방촌에 사는 외국인 인구 중 세 번째를 차지한다. 용산구청 민원여권과에 따르면, 해방촌 외국인 인 구 상위 5개국은 미국, 나이지리아, 필리핀, 캐나다, 영국 순이라고 한다. 필리핀 사람들 은 주로 필리핀 슈퍼마켓 '피노이 마트'와 식당 '쿠시나'에 모인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 들이 함께 모여 있는 녹사평역 주변 길가는 영어로 된 간판들로 가득 차 있다. 녹사평 역쪽 까페거리에 처음오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펍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는 외국인들이 넘치는 거리를 보며 이국적인 풍경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잡지를 보고 찾아오는 외부인은 더욱 늘어난다. 해방촌에 까페거리가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태원이나 한남동의 높은 물가와 임대 료에 질린 외국인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이태원을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레스토 랑, 카페, 펍들이 잇따라 들어섰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해방촌 주민들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까페거리에 있는, 40년된 목공소를 운영하는 한 주민은 “예전에는 해방촌 인심이 좋았는데 까페거리가 들어서면서 인심이 야박해진 경향이 있 다. 원주민들은 떠나고 소위 강남사는 사람들이 투자목적으로 집을 사서 외국인들에게 세를 받아 수익을 올리기에 급급하다. 이 근처는 전세도 모두 사라지고 외국인들을 대 상으로 한 높은 월셋집만이 존재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까페거리 근처에 산다는 한 주 민도 “금요일 밤이면 너무 시끄러워서 모든 창문을 닫고 자야한다. 까페거리가 생겨서 불편하다”고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까페거리는 단순히 외국인들과 소위 놀기 좋아하는 청춘들의 유흥을 위한 장소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공연하고 싶지만 외국인이 라는 이유로 무대에 서는게 불법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꿈을 펼치는 장소이며, 타향 살이의 서러움을 겪는 외국인들에게는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소이다. 해방촌은 한 겹만 벗겨봐도 '떠오르는 거리'도, 다국적 식당이 모여 있는 골목도 아닌, 그저 '생활 '하는 사람들의 공간인 것이다. HBC 페스티벌 HBC거리의 꽃 HBC Festival. 해방촌의 놀기 좋아하는 외국인들이 모두 모여 젊음을 향 유하는 날이다. 주로 HBC 거리의 가게들에서 뮤지션들의 공연이 진행되는데, 보는 사 람들이 너무 많아 가게 앞의 차도까지 사람들이 북적거리기도 한다. 그 사람들에게 사 고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띠를 두르는 진풍경을 연출하 기도 한다. 해방촌이 ‘핫 플레이스’로 알려지는 계기가 된 축제이기도 하다. HBC 페스티벌의 주최자인 랜스 리건 디엘(Lance Reegan Diehl)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 다. 랜스 리건 디엘은 한국에 온지 약 14년 된 외국인으로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밴드 -39-
  40. 40. 해방촌 신택리지 <HBC 페스티벌은 1년에 두 번, 봄 가을에 열리는 외국인중심의 음악축제다.> 의 리더로 활동 중이다. 같은 팀 내 보컬 한국인 Megan Kim씨와 결혼을 했고 국내 유 명 가수인 보아, 성시경 등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다. 현재 해방촌 안에서 ‘Deeleebob Music’ 음악 스튜디오를 운영 중이다. HBC Festival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걸까? “무대에 서고 싶은 외국인들이 많은데, 한국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하는 외국인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 외국인에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그래서 페이스북을 통해 HBC festival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알렸고, 후에 공연을 열 수 있는 다양한 식당들과 밴드들에게 연락 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페스티벌이 올해로 7년째다. “일년에 두 번, 5월과 10 월에 열려요. 특히 10월 할로윈데이에 열리는 축제는 많은 외국인들이 여러가지 코스프 레를 한 채로 모여 광란의 분위기가 형성되죠. 축제는 공연을 할 수 있는 식당에서 진 행되고, 따로 공연비를 받지 않는 대신 음식값을 지불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때 가 게의 매출은 평소보다 3배나 올라요.”장소 대여비로 수익의 대부분이 나가고 일부는 음 향장비를 갖추는 데 쓰인다고 한다. 때문에 축제에 참여하는 밴드에게 따로 공연료가 지불되지는 않는 현실이다.“다만 이 무대를 계기로 홍보가 되어 밴드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주최자 랜스 리건 디엘은 소회를 밝혔다. -40-
  41. 41.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해방촌 눈여겨볼만한 것들> 해방촌 오거리 <주민센터에서 찍은 해방촌오거리 모습, 사람과 차가 엉켜있고 멀리 해방교회 첨탑이 보임> 해방촌의 핫 플레이스(Hot Place)라고 하면 외지 사람들은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까페거 리 HBC를 떠올릴 것이고, 해방촌 사람들은 해방촌 오거리를 떠올릴 것이다. 해방촌의 가장 높은 곳으로 다섯 갈래의 길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도 차도 많이 다닌다. 택시가 유달리 많이 다니는 것은 남산 터널에 통행료를 내지 않고 남산을 넘는 택시들이 해방촌을 통해 다니기 때문. 유동인구가 많기 때문에 시장도 있고, 관공서(용산2가동 주민센터, 치안센터)도 있고, 부동산도 많다. 오가는 장사 트럭도 많은데 아침 10시에서 11시 사이에는 채소차, 퇴근 시간인 5시부터는 족발과 순대를 파는 차, 가끔은 해방교회 쪽에 뻥튀기 차도 온다. 해 방촌 오거리가 있는 신흥로는 미군기지로 갈라진 용산의 동과 서를 잇는 주도로 였다 고 한다. 소월로가 생기면서 잠시 조용해졌던 신흥로는 남산터널 이용료를 피해 온 차 량으로 출퇴근 시간에는 꽤 붐빈다. 해방촌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이 오거리를 어떻게 건너야하는지 각 방향에서 오는 차량때문에 정신줄을 놓곤 하는데 몇 달 지내다보면 그 차들을 요리저리 피해 쉽게 건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도로 설계법 중에 신호없는 교차로, 회전교차로, 좁은 차로와 보차공존도로는 보행자위 -41-
  42. 42. 해방촌 신택리지 주의 방식이다. 해방촌 오거리는 신호없는 교차로, 후암동 종점은 회전교차로, 좁고 중 앙선과 보도가 없는 해방촌의 주요 도로들은 자동차의 과속을 막는 트래픽 카밍(Traffic Calmig)역할을 하고 있다. 골목길 <골목산책루트.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특이한 구간을 스케치하고 정리> - 밀, <밀의 해방촌 골목스케치> 해방촌은 무허가 판자촌이 마을의 원형이기 때문에 길이 거미줄처럼 복잡하다. 직선이 아닌 발 길따라 난 고불고불한 길이 처음에는 길을 헤매게 만든다. 하지만 너비가 좁고 경사가 급해서 차가 못가는 길이 많아 골목 산책을 하기 좋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전쟁 후 피난민들이 건축일용직에 많이 종사하였기 때문에 재개발도 주민 스스로 해나 갔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재료로 만들어진 길과 핸드레일도 볼 수 -42-
  43. 43.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이것 저것 덧대어 만든 건물도 볼 수 있다. 누가 만든 도 시에, 집에 사는 것이 아닌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변화해가는 해방촌의 골목을 탐험하 듯이 걸어보는 건 어떨까. 저층건물들 <해방촌을 남북 동서로 나눈 다이어그램> - 서선영/이석정, <해방촌의 지속가능한 물리적 요소에 관한연구> 중 <구릉지형을 느낄 수 있는 해방촌 스카이라인> -43-
  44. 44. 해방촌 신택리지 나라에서 각 땅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어떤 용도로 어떤 높이로 지을 수 있는지 정한 것을 토지이용계획원이라고 한다. 토지이용계획원에 따르면 해방촌은 '1종 일반 주거지 역', '최고 고도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1종 일반 주거지역’은 주거지역 중 저층형이고 생활에 꼭 필요한 상업시설만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엄격한 주거지역이다. 또 ‘최고 고 도지구’는 지을 수 있는 건물의 최고 높이를 정해놓은 것 인데 해방촌은 최고 높이 12M, 3층 규모로 정해져 있다. 따라서 해방촌에는 주거기능을 가진 4층 이하의 건물 밖 에 볼 수 없다. 또 군사시설 주변엔 보안상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기에 미군기지 주변 은 담과 길로 마을과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법규와 시설물의 특이성으로 해방촌은 낮 은 건물이 주가 되어, 남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오는 구릉지의 형상을 반영한 독특 한 스카이라인을 만들고 있다. 가파른 경사 <남산자락 해방촌 특유의 가파른 경사> 남산 중턱에 생긴 마을답게 경사가 일품(?)인 해 방촌. 조사를 하면서 신기했던 것은 주민들이 내 리막과 오르막을 정말 가볍게 오르내린다는 것 이다.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조사기간 내내 운 동화를 신고 다녔고, 초행인 사람들은 불편한 신 발이나 힐을 신고 오지 않기를 조언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경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경사 덕분에 자칫 빽빽한 건물에 갇힐 수 있는 시야 가 트이게 되고, 어디를 향해도 하늘이 시원하게 보이는 해방촌 특유의 경관이 생겼다. 한강변에 서 바라보면 해방촌은 마치 집으로 이뤄진 산처 럼 보이는데, 장벽같이 놓여 하늘을 가로지르는 아파트들과는 달리, 모두가 햇볕은 나눠 쬐는 동 네처럼 보인다. 하지만 경사지여서 생기는 문제도 있는데, 오르내리기 싫어하는 몇몇 사람들이 쓰레기 를 지정된 곳에 버리지 않고 경사도로에 그대로 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환경미화원 아 저씨들이 제일 고된 동네 중 하나가 해방촌이라고 한다. 해방촌 축제를 진행할 당시 보성여고 학생들이 쓰레기 분리수거 및 배출시간, 장소 등 에 대한 캠페인을 벌이는 등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는 점이 그나마 안도가 되는 일이다. -44-
  45. 45. 용산2가동(해방촌)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 마을버스 앞에서 얘기했던 신흥로는 해방촌의 가장 큰 차도다. 신흥로를 따라 도시의 교통과 연 결하는 마을버스 용산 02번은 해방촌의 가장 중요한 교통시설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 다. 마을버스는 크기가 가장 작은 사이즈의 버스모델로 중앙선도 없는 좁은 교차로를 이리저리 잘 다닌다. 가파른 길을 지날 때는 손잡이를 꽉 잡으라는 음성이 재밌다. 어르신들이 많이 타시기 때문에 노약자석이 아니어도 비워두는 경우도 봤고, 마을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해서인 지 타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들의 인사도 자주 볼 수 있다. 용산02는 6호선 녹사평역과 4호선 숙대입구역, 1호선 남영역에서 탈 수 있다. 해방촌 예술마을 용산구청은 해방촌의 역사와 변화 의 흔적을 녹여내는 동시에 노후 된 거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해 방촌에 예술 작품을 설치하는 ‘해 방촌 예술마을 사업’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참신한 사업 의도에 힘 입어 ‘해방촌 예술마을 조성 사업’ 은 안전행정부에서 지원하는 국고 보조금 교부 선정돼 지난해 5월부 터 본격적인 예술마을 조성에 들 어갔다. 용산구청 도시디자인과 관계자와 사업 담당 업체 ‘스페이스 브랜딩’ 의 김대영 대표는 “해방촌은 관광 명소로 유명한 남산 소월길, 녹사 평역 경리단길, 이태원과 가까운 중간 지역이다. 이와 같은 교통 이점과 해방촌의 스토리를 살려 위의 지역과 연계·방문해볼만 한 산책 탐방 명소로 만드는 것이 목 <해방촌 예술마을 벽화작품. 주민들이 그린 벽화작품이 표”라며 “시끌벅적한 기존의 외국 곳곳에 숨어있다.> -45-

×